늦게 하는 공부

콘라트 로렌츠 평전 - 2

돌스&규스 2014. 2. 10. 10:15

 




 

 

콘라트 로렌츠

클라우스 타슈버, 베네딕트 푀거 지음, 안인희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3

 

 

콘라트 로렌츠 평전 - 2

 


   4장, 5장은 그가 비교행동학이라는 이론의 토대를 마련하는 시기로서, 그의 저택에서 엄청난 수의 조류와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관찰하였다. 그가 관찰한 새들의 목록을 살펴보자면 “(비단)왜가리 15마리, (밤) 왜가리 3마리, 뜸부기 6마리, 흰색과 검은색 황새들, 수많은 물오리, 길들인 터키 오리, 신부 오리 2마리, 회색기러기 2마리, 말똥가리 9마리, (말벌) 말똥가리 1마리, 황새 수리 1마리, 가마우지 7마리, 황조롱이 9마리, 금계 12마리, 큰 갈매기 1마리, 제비갈매기 2마리, 큰 노랑머리앵무새 2마리, 아마존 앵무새 1마리, (수도사) 앵무새 7마리, 도래 까마귀 20마리, 뿔 까마귀 4마리, 큰 까마귀 1마리, 까치 7마리, 갈까마귀 100마리 이상, 어치 2마리, 알프스 까마귀 2마리, 잿빛 밤 꾀꼬리 2마리, 피리새 3마리 등이다.” 콘라트 로렌츠는 4년여간 갈가마귀 무리를 광범위하게 관찰한 결과를 「사회생활을 하는 까마귀들의 비교행동학 연구」라는 논문으로 발표했다. 콘라트 로렌츠의 두 번째 논문이며 비교행동학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논문이었다. 그 당시의 학문적 기조는 행동주의였는데 행동주의의 대표적 학자들은 동물에게 타고난 행동이나 주관적인 체험이 없고 모든 것은 학습된 것이라는 주장을 했으며, 콘라트 로렌츠와 같이 동물을 자연 상태에서 기르고 관찰하는 일을 학문적인 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꾸준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관찰을 연구방법으로 선택했다. 


   그는 해부학 조교 시절에 생업으로서의 해부학과 천직인 동물심리학 사이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고민 끝에 스승인 슈트레제만에게 하소연하게 되었을 때 슈트레제만은 원래의 성향을 선택하라는 답장을 받고 용기를 얻어 해부학을 버리고 본격적인 학문으로서의 동물학에 투신하게 된다. 그는 그 후에도 자신의 연구에 필요한 재정마련을 위해 일거리와 수입원을 찾으려 많은 노력을 했으며 그 목적으로 대중을 위한 과학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입은 연구와 생활을 위해 쓰기에 항상 모자랐고 의사인 부인과 부모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학문 분야에 뛰어난 인물로 손꼽히면서도 경제적으로는 항상 부족한 처지였다. 훗날 “회색기러기의 아빠”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유도 재정적인 이유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당시 오리들보다 회색 기러기가 더 싸게 먹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회색기러기 새끼인 마르티나를 키우며 “각인” 효과를 발견하게 되었다. 콘라트 로렌츠는 그의 관찰과 연구를 위해 동영상을 촬영하여 강연에도 활용하고 학문적인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는데 이러한 동영상들은 인생에 가장 중요한 학문적 동지인 네덜란드의 생물학자 니콜라스 틴버겐을 만나게 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연구 방식이 조금씩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가며 공동연구를 했으며 그 결과물이 「회색기러기가 알을 굴리는 행동에 나타나는 본능 동작과 자극에 의한 동작」이라는 논문이다.

 

   6장부터 10장까지는 그가 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에 동참했던 어두운 이력에 대해 5장에 걸쳐 꽤 많은 양을 할애했다. 이 부분은 저자들이 머리말에서 말하기로는 그렇게 뛰어난 연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늘날 전공 분야에서 학자들에게 자주 인용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연구를 진행한 방식이 유행에 뒤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도 그가 한동안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 사상에 열렬히 동조했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극적인 삶의 어느 부분에서 어두운 시절이 닥쳐왔을 때 그는 “몽상적 기회주의자”였다고 저자들은 묘사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미완성으로 남은 그의 회고록에서 나치 시절의 자신에 대해 상세하게 써 놓았지만 어쩔 수 없는 기억의 혼란이나 오류들에 대해 “네가 그렇게 했다고 네 기억은 말한다. 하지만 네 자부심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기억이 자부심에 밀리고 만다.” 라고 니체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전쟁 발발 후 그는 의사로서 입대하지 않고 오토바이병으로 군에 들어갔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젊은 시절 오토바이 사고로 크게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오토바이 타는 것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는 군대에서 나치의 인종 혹은 민족 심리 연구에 관여했으며, 그 사실은 그의 회고록에는 단지 “폴란드 출신의 역겨운 실험 대상자들을 상대로 지루한 실험을 계속해야만 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그 사실을 나이가 든 로렌츠가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기억의 혼란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콘라트 로렌츠는 군 정신과에 근무하다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고 수용소 의사로서 독일군 포로를 보살폈다. 그는 환자들에게 자신이 연구한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의사로서 인기가 있었고, 할 일은 많았지만, 여유 시간 또한 많아서 비교행동학에 대해 상당히 많은 양의 저술을 할 수 있었다. 그러한 저술 활동이 바로 훗날 『거울의 뒷면』,『비교행동학』의 토대가 되었다.

 

 

* 표절심사 데이타베이스에 등록되어 있는 문건이므로 과제에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콘라트로렌츠 평전 1은  http://doling.tistory.com/375 를 참고해주세요. 

 

* 내용이 긴 관계로 1, 2, 3, 4 이렇게 나누어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