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게 되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힘을 가진 소설 - 캐비닛 김언수 장편소설

돌스&규스 2011. 2. 15. 22:18




















"나는 소설이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 배웠고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세상을 향해 멋지게 냉소를 날리는 것이, 실험적이고 참신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힘이 바로 문학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안다."

- 캐비닛 작가 김언수 작가 한 마디 中 -


최초의 심사위원 만장일치! 제12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



"최초의 심사위원 만장일치! 제12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
캐비닛을 여는 순간, 당신은 이제까지의 소설세계를 폭파시켜버릴
메머드급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이 책, 캐비닛 띠지에 붙어 있는
조금은 낯간지러운 홍보문구이네요.

제가 소설을 구매하는 기준은 여러가지이지만,
요즘에는 문학동네 소설상에 꽃혀 있어, 위의 홍보문구로 이 책을 구매하기는 했지만,

아마 캐비닛의 작가, 김언수님은 싫어하지 않았을까 생각 해 봅니다.



작가에게 관용을 베푸는 독자는 이 세계에 단 한명도 없다.



이 책 맨뒤에 나와있는 수상소감을 살펴보면,
"작가에게 관용을 베푸는 독자는 이 세계에 단 한명도 없다.
이것은 잠언이 아니다. 이것은 통계에 관한 말이다.
부끄럽게도 얼마 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로 시작하여..


나의 선생은 소설쟁이가 농부, 어부, 막노동꾼처럼 자신의 가족을 위해 신성한 밥벌이를 하는
성실한 사람들에 비해 두 수 아래에 있는 존재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선생이 틀렸다.

소설을 쓰고자 하는 가장 근원적인 욕망은 허영이므로,
소설쟁이는 그들보다 최소한 세 수쯤은 아래에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독자들은 작가에게 관용이란 걸 베풀 필요가 없다.

당신이 이 저열한 자본주의에서 땀과 굴욕을 지불하면서 힘들고 어렵게 번 돈으로 한 권의 책을 샀는데
그 책이 당신의 마음을 호빵 하나만큼도, 붕어빵 하나만큼도 풍요롭고 맛있게 해주지 못한다면
작가의 귀싸대기를 걷어올려라. 그리고 멋지게 한마디 해주어라.

"이 자식아, 책 한 권 값이면 삼 인 가족이 맛있는 자장면으로,
게다가 서비스 군만두도 곁들여서, 즐겁게 저녁을 먹는다. 이 썩을 자식아!"

그런데 내가, 겁도 없이, 책을 내게 되었다.
분수도 모르고 덜컥 상까지 받아버려서 이제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하지만
귀싸대기 맞을 각오는 되어 있다.


라고, 끝을 맺고 있으니..
위의 "심사위원 만장일치"라는 홍보문구는
그에게 부담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귀싸대기 맞을 걱정은 전혀 없어보이는 김언수 장편소설 캐비닛 (CABINET)



이 소설은 처음부터 '구라'(=허구)로 시작하여,
끝까지 '구라'로 끝나는 소설입니다.

뭐,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픽션(Fiction)이니,
이 소설이 구라라고 할 수도 없지만 말이죠.

캐비닛에 대해서 한 줄로 평가를 잘 해놓은
은희경 소설가님의 심사평이 있어 그대로 인용해 보자면,

"파격적인 형식을 갖고 있지만 구성적 필연성을 갖고 정밀하게 잘 짜인 소설이며
능청스러운 '구라'가 일품이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시니 아무리 소설이 픽션이라 해도
이 소설을 이야기 할때 '구라'를 빼 놓고 이야기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제, 캐비닛 소설 속으로 잠시 들어가 보면

치열한 취업경쟁을 뚫고
Y 공기업에 입사한 주인공..

그러나, 아무런 이슈도 없고 주어진 일도 별로 없는 그는
"개껌이라도 질근질근 씹어먹고 싶은 처절한 무료함"에
13호 캐비닛을 발견하게 되고,
그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비밀 문서를 하나둘씩 읽으며..
그 세상 속으로 빠져 들게 됩니다.

그 캐비닛안에는

입 속에 혀 대신 도마뱀을 키우는 여자,
새끼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남자,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고양이로 변신하고자 하는 남자,
갑자기 시간을 잃어버리는 타임스키퍼,
한명의 육체를 여럿이서 나눠쓰는 다중소속자,
남성성과 여성성을 같이 가지고 태어나
자신의 정액을 자신의 질 속에 집어넣어 스스로 임신하는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
등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그 들을 관리하고 상담하게 되는 일을 하게 되는 이야기 입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미드였던 엑스파일에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는 "에이~ 말도 안돼~"하다가..
"그럴수도..",... 였다가.. "진짜 아냐~!"라는 생각에 빠져 들게 되죠.

허구에 사실을 섞어내는 그의 풍부한 지식에 속고,
은희경 작가가 이야기 했든 너무나 능청스러운 그의 이야기에 속게 되는 것이죠.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 속에서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캐비닛의 소설은 다양한 소주제로 나뉘어져서,
장마다 중요하게 부각되는 인물이 다르지만,

그 결과는 항상 똑같습니다.

바로 사랑을 갈구하거나, 사랑을 주고 싶거나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이야기"인 셈이죠.

이는 김언수 작가 한 마디와도 일치하는 부분인데..
이 귀결점으로 인해, 이 소설은 매우 훌륭해 집니다.

그냥 관심 끌기용 구라이거나,
요즘 TV에서 방영하고 있는 "진실 혹은 거짓"에서 처럼 사람의 이목을 끄는 괴기스러운 이야기로만
가득했다면 이 소설은 형편 없어졌을테지만요..




작가의 인터뷰와 오묘하게 오버랩되는 캐비닛 소설의 마지막 대사



천국에서 권박사가 물었다.
"요즘 어때?"

"아주 나빠요.
도대체 이 섬에서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글쎄, 꼭 뭘 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냥 자네의 시간을 견뎌봐.
인생이란 그저 시간을 잠시 담아두는 그릇에 불과한 거니까."

"캐비닛처럼요?"

"그래, 마치 캐비닛처럼."

캐비닛 소설 中


"제가 만나왔던 많은 사람들이 지지리 가난하고 힘들거든요.
빚도 많고, 일도 안 풀리고, 앞도 안 보이고, 사는 건 팍팍하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술자리는 언제나 웃기고 즐거워요.

보통 허리가 끊어질 듯 웃다가 돌아오는데 막상 뒤돌아서서
사는 꼴이 어떤지 살펴보면 분위기가 거의 임진왜란이에요.

항상 답답하고 엉망이죠.

그런데도 엄살떨지 않아요.

그런 거대한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는 자기가 아프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전염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어떤 건강성과 삶의 정직함이 있어요."
- 전경린 작가와의 인터뷰 내용 中 -

그래서인지
캐비닛에 나오는 안타깝고, 애처로운..
등장인물에게 자꾸만 애정이 갑니다.

*이 책에 사용된 일러스트는 일러스트레이터 박하님의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