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읽혀지지만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이기호 단편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그가 보여주고 있는 이 아이러니의 소설공학은 2000년대 문학
이 선사하는 여러 유쾌함들 중에서도
가장 '개념있는' 유쾌함 중의 하나다.
그 아이러니의 저의가 대부분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는 최근 젊은 작가들에게서 다양하게 복제 혹은 변주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아이러니의 '원천기술'은 그에게 있는 것 같다.
조롱과 연민 혹은 웃음과 눈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우리 이럴 줄 알았다.
신형철(문학평론가)
이기호
1972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추계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1999년 '현대문학' 신인추천공모에 단편 '버니'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
산문집 ' 독고다이'
테마소설집 '피크'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 짧은 서평 >>
단편소설 여러개가 묶여 있는
우울한 주제를 해맑은(?) 언어로 풀어 쓴
낯설면서도, 쉽게 읽혀지고
쉽게 읽혀지면서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
멋진, 소설
그리고, 이어지는 책 속의 내용들
1. 나쁜 소설
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 주는 이야기
그깟 소설이 무엇이길래.
하지만 그럴수록 당신 마음 한편에선 어떤 오기 같은 것이 끊임없이 치고 올라왔지요.
기필코, 그 누군가에게, 소설을, 내 목소리로, 꼭, 읽어주고, 말리라는....
2.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흙이란 게 말입니다.
처음 몇 번 먹을 때가 힘들지 요령을 익히고 나면 그 다음부턴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그 선입견만 깨지면 흙은 더이상 흙이 아니라, 쌀로, 빵으로, 여러분의 주식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다른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을 만큼 훌륭하고 향긋한 맛으로.
3. 원주통신
나 박경리는, 박용구가 소속된 사업장에 대해
'토지' 상호 사용권을 허락하며, 이에 대하여 일체의 이의도 제기하지 않음을 확인합니다.
두통이 말끔히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아울러 갈증도 쏵 가시고,
그때까지 남아 있던 술기운도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찬바람이 쩡, 한쪽 귀로 들어가 반대편 귀로 흘러나왔다.
4. 당신이 잠든 밤에
"괜찮냐?" "한두 번 맞는 것도 아닌데, 뭘....."
"예전에도 이런 일 있었어?" "한 열댓번.... 원래 깡패한테 잘 걸리는 체질이야."
"그런 체질도 다 있냐?" "맷집 하나는 국내 최고거든..."
5. 국기게양대 로망스 / 당신이 잠든 밤에 2
"사실은.... 저도 국기게양대를 사랑하고 있어요!
저도 사실은 아저씨처럼 이 국기게양대하고 사랑을 나누는, 그런 사이에요."
바람이 또 한번 국기를 펄럭, 일렁이게 한 뒤 사라졌다.
게양대 끝 둥그런 스테인리스 봉에 달빛이 비쳤다.
6. 수인
그가 라이터를 켜면 그곳에 소설이 있었고,
그가 라이터를 끄면 소설은 사라졌다.
그는 반복해서 라이터를 켰다 껐다.
어둠 속, 축구장 크기만한 서점 안에, 수많은 발명품들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는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어디선가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7.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
그러니, 어쩌겠는가. 아무리 몹쓸 병에 걸렸다 하더라도...
한 가지 이야기에 사로잡혔다 하더라도,
할머니의 이야기가 힘이 더 센 것을...
8.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글은 무슨...
머리 아프고, 울적해지게, 내가 미쳤다고.... 미치지 않고서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다가 결국 또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le this would happen"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버나드 쇼의 묘비에 적힌 글귀이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글쎄 말이다. 나도 그럴 줄 알았다. 다 지나고 난 뒤에 보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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